베델믿음칼럼
‘카이노스’의 삶
Author
bethelfaith
Date
2014-11-30 00:00
Views
2378
‘카이노스’의 삶
‘카이노스’? 생소한 단어일 것 같습니다. 이는 새롭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지난 목요에배때 이 단어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우들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 전부의 얘기를 함께 나눌 수는 없지만 우리 함께 이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목요예배때의 일부를 지면에 옮깁니다(아래는 설교의 일부입니다).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말을 표현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네오스’이고 또 하나는 ‘카이노스’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절에(계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쓰인 단어는 ‘카이노스’ 입니다.
우선 ‘네오스’라는 단어는 시간적으로 오래된 것과 비교해 새것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뉴스가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마9;17절에,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라는 포도주 앞에 ‘새’ 라는 단어에 ‘네오스’가 쓰입니다. 이전의 오래된 포도주가 아니라 새로운, 신선한 포도주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카이노스’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 단어는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을 의미할 때 쓰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마 9:17의 같은 구절안에서도 “새(네오스) 포도주는 새(카이노스)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에서 새 부대라는 말을 표현할 때 ‘카이노스’가 쓰입니다. 이 말은 단지 이전의 가죽부대를 씻어서 담아낸 포도주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가죽부대를 사용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는 말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 것에 쓰인 단어도 ‘카이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만일 이 단어가 ‘네오스’ 라고 쓰였다면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해도 단지 시간적으로 새로와졌다가 다시 과거가 되는 인생이 되었음을 말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분명히 ‘카이노스’가 쓰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 성도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조금은 길게 단어의 설명에 집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카이노스’의 의미를 그냥 지나쳐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이 ‘카이노스’를 적용하며 살고 있는가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시는 카이노스의 하늘, 카이노스의 땅, 카이노스의 예루살렘을 주신 것은 바로 성도인 우리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값을 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카이노스’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카이노스’의 영광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삶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에베소서2:10의 말씀에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목적이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았는데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네오스’, 지금 새로운 것 같으나 다시 이전의 습관과 행동으로 돌아가고 있는 삶은 아닙니까?
‘카이노스’, 진정으로 날마다 새로와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카이노스의 삶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받은 ‘카이노스’의 영광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우린 ‘카이노스’ 의 삶의 발걸음을 굳게 디뎌야 한다는 것을 결단하며 배우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베델믿음지기 서목사 드림.
‘카이노스’? 생소한 단어일 것 같습니다. 이는 새롭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지난 목요에배때 이 단어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우들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 전부의 얘기를 함께 나눌 수는 없지만 우리 함께 이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목요예배때의 일부를 지면에 옮깁니다(아래는 설교의 일부입니다).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말을 표현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네오스’이고 또 하나는 ‘카이노스’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절에(계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쓰인 단어는 ‘카이노스’ 입니다.
우선 ‘네오스’라는 단어는 시간적으로 오래된 것과 비교해 새것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뉴스가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마9;17절에,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라는 포도주 앞에 ‘새’ 라는 단어에 ‘네오스’가 쓰입니다. 이전의 오래된 포도주가 아니라 새로운, 신선한 포도주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카이노스’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 단어는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을 의미할 때 쓰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마 9:17의 같은 구절안에서도 “새(네오스) 포도주는 새(카이노스)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에서 새 부대라는 말을 표현할 때 ‘카이노스’가 쓰입니다. 이 말은 단지 이전의 가죽부대를 씻어서 담아낸 포도주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가죽부대를 사용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는 말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 것에 쓰인 단어도 ‘카이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만일 이 단어가 ‘네오스’ 라고 쓰였다면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해도 단지 시간적으로 새로와졌다가 다시 과거가 되는 인생이 되었음을 말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음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분명히 ‘카이노스’가 쓰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 성도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조금은 길게 단어의 설명에 집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카이노스’의 의미를 그냥 지나쳐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이 ‘카이노스’를 적용하며 살고 있는가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시는 카이노스의 하늘, 카이노스의 땅, 카이노스의 예루살렘을 주신 것은 바로 성도인 우리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값을 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카이노스’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카이노스’의 영광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삶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에베소서2:10의 말씀에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목적이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았는데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네오스’, 지금 새로운 것 같으나 다시 이전의 습관과 행동으로 돌아가고 있는 삶은 아닙니까?
‘카이노스’, 진정으로 날마다 새로와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카이노스의 삶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받은 ‘카이노스’의 영광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우린 ‘카이노스’ 의 삶의 발걸음을 굳게 디뎌야 한다는 것을 결단하며 배우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베델믿음지기 서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