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믿음칼럼
인정과 긍정 2
Author
bethelfaith
Date
2013-08-05 00:00
Views
2811
인정과 긍정 2
이번 한 주간은 텍사스주 플래노(Plano city)에서 열린 SNA Conference에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잘 다녀왔습니다. 격려와 기도를 아끼지 않은 모든 교우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와 소망안에 다시 달려갈 것을 기도합니다.
우린 지난 주에 ‘인정과 긍정’이라는 주제로 첫번째 ‘인정’ 에 대한 단상을 잠깐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칼럼은 예고한대로 ‘긍정’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길 원합니다.
기억을 되짚어 지난 주의 전화 얘기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민주는 엄마와 아빠의 통화에서 자신의 잘못을 다른 얘기로 대체하고자 하는 의도, 곧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얘기를 함께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민주가 그 전화를 통해서 가르쳐준 메시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엄마가 아빠에게 전화로 얘기할 때, 묻지도 않았는데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려 엄마의 뜻에 긍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민주는 엄마가 왜 화가 났는지 그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엄마와 아빠가 통화하는 그 얘기에 끼어들어 엄마의 얘기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다섯 살먹은 아이를 둔 부모의 고충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돌아보면, 늘 이와같은 실수를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얘기에 대해 우리도 쉽게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인정’이 자신에 대한 반응이라면 ‘긍정’은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라 볼 수 있습니다(적어도 오늘 제가 쓰는 칼럼의 정의에서는..)
일주일전, 저는 헬무트 리처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가 쓴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을 접했는데, 그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모리스가 J. S. 밀(mill)로부터 배운 원칙이 하나 있는데, 우리도 경청할 만한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긍정하는 것은 옳은데 자신이 부인하는 것은 틀릴 때가 많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우리가 부인하는 것은 보통 우리의 경험 바깥에 있는 것이라 그에 관해 말이 없는 경우다. (중략) 문화가 악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그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할 때는, 마치 자신이 상대적인 관점을 초월하여 하나님처럼 판단할 수 있는 것 같이 착각하는 셈이다. 신앙은 한 가지 절대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신자의 상황과 지식의 상대성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 내용만 갖고서는 어쩌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요지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자신이 싫어하고 부인하는 것에 대해 틀리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와 생각이 같지 않은 환경, 사람, 일들을 만나도 우리 주변의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타인과 환경, 모든 것에 대한 가치 평가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둬야 합니다. 저는 ‘긍정의 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의 신학, 번영신학은 자신의 의지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이런 ‘번영 신학은 복음이 아니고, 증오한다’고 하는 존 파이퍼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없는 긍정은 소용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며,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 아닌 타인이나 환경도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과 환경을 긍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보는 모든 베델믿음의 성도들이 되길 소망하며…,
베델믿음지기 서목사 드림.
이번 한 주간은 텍사스주 플래노(Plano city)에서 열린 SNA Conference에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잘 다녀왔습니다. 격려와 기도를 아끼지 않은 모든 교우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와 소망안에 다시 달려갈 것을 기도합니다.
우린 지난 주에 ‘인정과 긍정’이라는 주제로 첫번째 ‘인정’ 에 대한 단상을 잠깐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칼럼은 예고한대로 ‘긍정’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길 원합니다.
기억을 되짚어 지난 주의 전화 얘기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민주는 엄마와 아빠의 통화에서 자신의 잘못을 다른 얘기로 대체하고자 하는 의도, 곧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얘기를 함께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민주가 그 전화를 통해서 가르쳐준 메시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엄마가 아빠에게 전화로 얘기할 때, 묻지도 않았는데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려 엄마의 뜻에 긍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민주는 엄마가 왜 화가 났는지 그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엄마와 아빠가 통화하는 그 얘기에 끼어들어 엄마의 얘기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다섯 살먹은 아이를 둔 부모의 고충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돌아보면, 늘 이와같은 실수를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얘기에 대해 우리도 쉽게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인정’이 자신에 대한 반응이라면 ‘긍정’은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라 볼 수 있습니다(적어도 오늘 제가 쓰는 칼럼의 정의에서는..)
일주일전, 저는 헬무트 리처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가 쓴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을 접했는데, 그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모리스가 J. S. 밀(mill)로부터 배운 원칙이 하나 있는데, 우리도 경청할 만한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긍정하는 것은 옳은데 자신이 부인하는 것은 틀릴 때가 많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우리가 부인하는 것은 보통 우리의 경험 바깥에 있는 것이라 그에 관해 말이 없는 경우다. (중략) 문화가 악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그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할 때는, 마치 자신이 상대적인 관점을 초월하여 하나님처럼 판단할 수 있는 것 같이 착각하는 셈이다. 신앙은 한 가지 절대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신자의 상황과 지식의 상대성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 내용만 갖고서는 어쩌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요지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자신이 싫어하고 부인하는 것에 대해 틀리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와 생각이 같지 않은 환경, 사람, 일들을 만나도 우리 주변의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타인과 환경, 모든 것에 대한 가치 평가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둬야 합니다. 저는 ‘긍정의 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의 신학, 번영신학은 자신의 의지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이런 ‘번영 신학은 복음이 아니고, 증오한다’고 하는 존 파이퍼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없는 긍정은 소용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며,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 아닌 타인이나 환경도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과 환경을 긍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보는 모든 베델믿음의 성도들이 되길 소망하며…,
베델믿음지기 서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