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믿음칼럼
바꿀 수 있다
Author
bethelfaith
Date
2013-03-24 00:00
Views
3767
바꿀 수 있다
“아빠, 엄마 나 ‘곰 세마리’ 노래 바꿀 수 있다” 민주가 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제안을 합니다.
“어떻게, 한 번 해 봐” 그냥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곰 세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
아빠 곰은 날씬해, 엄마 곰은 뚱뚱해, 애기 곰은 아주 귀여워.
으쓱 으쓱 잘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 쯤 아이들과 함께 불러봤을 이 노래의 원래 가사를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아빠 곰은 뚱뚱해 ~ 엄마 곰은 날씬해 ~’ 라는 가사가 원래 가사입니다.
그런데 민주는 이 노래 가사의 ‘뚱뚱해’ 앞에 아빠대신 엄마를, ‘날씬해’ 앞에 엄마대신 아빠를 과감하게 바꿔부른 것이지요.
저도, 아내도 차를 타고 가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요즘 아빠, 엄마의 체형을 보고 솔직하게 바꿔부른 것은 아니겠지만(물론 아니라고 믿습니다만…) 정말 웃겼습니다. 나중에는 민주가 ‘엄마 곰은 귀여워’라고 바꿔 불러서 아내가 조금은 위로를 받았답니다.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가장 시끄럽게 구는 민주덕분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그 정신없던 현장에서 주님은 뭔가를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나이가 들고, 사회의 거칠고 모진 삶을 견디면서 점점 더 굳어져 가는 것이 있습니다. 왠만해서 잘 바뀌지 않습니다. 아니 이미 굳어버려 왜 굳어 있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쌓아 둔 ‘자기 자신’ 이라는 울타리입니다. 이 울타리는 습관, 성격, 가치관, 내재된 성품등 자신이 쌓아 둔 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위기관리 상황에서는 상대적 위험에서 보호하는 강력한 ‘자기방어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더 깊은 상처와 아픔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 한평생 살았는데 어떻게 바꾸겠어! 그것 봐. 내 생각이 맞아!’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들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꾸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고, 그래서 바꾸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며칠 전, 저는 아내와 어떤 상황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심하게 핀잔을 당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적이 없잖아” 라는 제 말에 아내의 안색이 바뀌면서 말에 대한 실수를 지적당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저도 제 말에 토를 다는 아내에게 한 마디 쏘아 붙였을텐데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말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말도, 행동도, 습관도, 성격도 잘 바꿔지지 않습니다. 고집과 아집이 ‘성격’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서 점점 더 자신의 성을 쌓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친절도 관심도 없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변화되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13:14), 예수의 마음을(빌2:5)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삶(빌1:21)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빛인 여러분, 빛의 자녀들처럼(엡5:8) 드러나는 우리의 바뀐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는 말씀 앞에 다시 엎드려 봅니다(엡5:9).
베델믿음지기 서목사 드림.
“아빠, 엄마 나 ‘곰 세마리’ 노래 바꿀 수 있다” 민주가 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제안을 합니다.
“어떻게, 한 번 해 봐” 그냥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곰 세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
아빠 곰은 날씬해, 엄마 곰은 뚱뚱해, 애기 곰은 아주 귀여워.
으쓱 으쓱 잘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 쯤 아이들과 함께 불러봤을 이 노래의 원래 가사를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아빠 곰은 뚱뚱해 ~ 엄마 곰은 날씬해 ~’ 라는 가사가 원래 가사입니다.
그런데 민주는 이 노래 가사의 ‘뚱뚱해’ 앞에 아빠대신 엄마를, ‘날씬해’ 앞에 엄마대신 아빠를 과감하게 바꿔부른 것이지요.
저도, 아내도 차를 타고 가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요즘 아빠, 엄마의 체형을 보고 솔직하게 바꿔부른 것은 아니겠지만(물론 아니라고 믿습니다만…) 정말 웃겼습니다. 나중에는 민주가 ‘엄마 곰은 귀여워’라고 바꿔 불러서 아내가 조금은 위로를 받았답니다.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가장 시끄럽게 구는 민주덕분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그 정신없던 현장에서 주님은 뭔가를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나이가 들고, 사회의 거칠고 모진 삶을 견디면서 점점 더 굳어져 가는 것이 있습니다. 왠만해서 잘 바뀌지 않습니다. 아니 이미 굳어버려 왜 굳어 있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쌓아 둔 ‘자기 자신’ 이라는 울타리입니다. 이 울타리는 습관, 성격, 가치관, 내재된 성품등 자신이 쌓아 둔 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위기관리 상황에서는 상대적 위험에서 보호하는 강력한 ‘자기방어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더 깊은 상처와 아픔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 한평생 살았는데 어떻게 바꾸겠어! 그것 봐. 내 생각이 맞아!’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들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꾸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고, 그래서 바꾸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며칠 전, 저는 아내와 어떤 상황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심하게 핀잔을 당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적이 없잖아” 라는 제 말에 아내의 안색이 바뀌면서 말에 대한 실수를 지적당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저도 제 말에 토를 다는 아내에게 한 마디 쏘아 붙였을텐데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말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말도, 행동도, 습관도, 성격도 잘 바꿔지지 않습니다. 고집과 아집이 ‘성격’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서 점점 더 자신의 성을 쌓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친절도 관심도 없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변화되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13:14), 예수의 마음을(빌2:5)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삶(빌1:21)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빛인 여러분, 빛의 자녀들처럼(엡5:8) 드러나는 우리의 바뀐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는 말씀 앞에 다시 엎드려 봅니다(엡5:9).
베델믿음지기 서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