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믿음칼럼
손해보는 삶도 있습니다(12/4/2011)
Author
bethelfaith
Date
2012-09-22 00:00
Views
2987
저희 집엔 아시다시피 세 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그 중 둘째, 민하와 셋째, 민주가 TV를 보든, 게임을 하든 함께 사이좋게 지내는 편입니다. 저는 평상시엔 아이들이 하는 말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며칠 전부터 자주 들리는 말이 있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대화였습니다.
민하와 민주가 함께 컴퓨터에 앉아 아이들이 보는 DVD 를 보고 있었습니다. 민하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민주가 계속해서 Thomas DVD를 보자고(민주 표현은 ‘기차를 보자’고..) 조릅니다.
민하는 민주가 자꾸 우기는 바람에 다음과 같이 한 마디를 쏘아 붙입니다.
“민주, 너 그러면 캔디 안 준다. 캔디 못 먹어”
민하는 생각하길 민주가 캔디를 무척 좋아해서 자신이 민주를 이길 방법은 캔디를 안 준다고 협박(?) 하면 먹힐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TV 를 볼 때도 이 대화가 반복됩니다. 민하가 보고 싶은 것을 민주가 못 보게 하면 또 똑같은 협박(?) 이 이어집니다. “너 캔디 안 준다”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는 무척 웃기지만, 마냥 ‘재밌는 대화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키울 때나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린 모든 삶에 ‘나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갖고 있는 정답을 제시하고, 사회에서도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때론 하나님께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할테니 이번에 꼭 들어 주셔야 됩니다”
내가 중심이 되고, 손해보면 안 되는 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을 비우시고, 우리에게 맞춰주셨습니다. 마6장 8절에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요구하지 않아도 결국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 캔디 안 드립니다”, “하나님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꼭 이렇게 해 주셔야 됩니다” 라고 협박성(?) 기도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조금은 손해보자” 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함께 가 주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신 것을 귀 기울여 듣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고민해 봅니다.
이것은 물론 반드시 손해 보는 삶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삶이 아닙니다. 때론 바보같다고, 미쳤다고 말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고 싶지 않아도 “너 그러면 캔디 안 준다” 가 아니라 “그래도 줄 께” 라고 말하는 삶, 우린 이렇게 결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좁은 문으로(마7:13)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베델믿음지기 서목사 드림.
민하와 민주가 함께 컴퓨터에 앉아 아이들이 보는 DVD 를 보고 있었습니다. 민하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민주가 계속해서 Thomas DVD를 보자고(민주 표현은 ‘기차를 보자’고..) 조릅니다.
민하는 민주가 자꾸 우기는 바람에 다음과 같이 한 마디를 쏘아 붙입니다.
“민주, 너 그러면 캔디 안 준다. 캔디 못 먹어”
민하는 생각하길 민주가 캔디를 무척 좋아해서 자신이 민주를 이길 방법은 캔디를 안 준다고 협박(?) 하면 먹힐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TV 를 볼 때도 이 대화가 반복됩니다. 민하가 보고 싶은 것을 민주가 못 보게 하면 또 똑같은 협박(?) 이 이어집니다. “너 캔디 안 준다”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는 무척 웃기지만, 마냥 ‘재밌는 대화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키울 때나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린 모든 삶에 ‘나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갖고 있는 정답을 제시하고, 사회에서도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때론 하나님께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할테니 이번에 꼭 들어 주셔야 됩니다”
내가 중심이 되고, 손해보면 안 되는 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을 비우시고, 우리에게 맞춰주셨습니다. 마6장 8절에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요구하지 않아도 결국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 캔디 안 드립니다”, “하나님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꼭 이렇게 해 주셔야 됩니다” 라고 협박성(?) 기도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조금은 손해보자” 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함께 가 주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신 것을 귀 기울여 듣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고민해 봅니다.
이것은 물론 반드시 손해 보는 삶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삶이 아닙니다. 때론 바보같다고, 미쳤다고 말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고 싶지 않아도 “너 그러면 캔디 안 준다” 가 아니라 “그래도 줄 께” 라고 말하는 삶, 우린 이렇게 결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좁은 문으로(마7:13)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베델믿음지기 서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