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집에서 운동을 하는데요. 그 날 마침 ‘새롭게 하소서’ 간증을 보게 됐습니다. 간증하신 분은 수어(수화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셨죠. 그 때 하셨던 간증에 다음의 얘기가 깊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제가 만나 본 농맹인(청각과 시각의 이중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 중에 믿음이 좋은 분이 계셨는데요. 어느날 이 농맹인분에게 그의 어머니가 그랬어요. “수술하자” 그런데, 그 농맹인 분이 단호하게 “싫어요” 라고 하셨어요.
“왜 그러냐?” 라고 어머니가 물었더니,
“내가 농맹인이 되기 전에는 믿음이 없었어요 엄마. 그런데 농맹인이 된 다음부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살아 있어요. 나는 이 관계를 놓칠 수 없어요. 보는 것보다 차라리 나는 농맹인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살래요.”

저는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울음을 삼켜야 했습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장애를 가졌지만, 그 장애를 뛰어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만 살아있다고 고백했던 농맹인의 고백이 갑자기 ‘훅’ 하고 제 안에 깊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목사이니까 주변의 분들이 저를 볼 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받은 소명이 있으니깐 나름 성실하고 열심히 목회하는 것 같기는 한대, 실제적인 고난과 어려움이 오면 그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하는 믿음인가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욥은 하루 동안 갑자기 닥친 환난으로 죽음같이 처절한 고통을 겪었습니다(욥1:13-19). 소유한 가축들을 빼앗기거나 죽고, 자녀들이 죽고 종들이 죽었죠. 하루 사이에 말입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겉옷을 찢고 엎드려 예배하며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주신 이도, 걷어 가신 이도 여호와이십니다” 라는 그의 고백.
우리는 생각하길, ‘성경에 기록된 욥이니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거야,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고 사랑한 사람이잖아’ 라고 말하며 나와는 관계없는 얘기처럼, 무의식 중에 욥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에서 전한 농맹인의 고백은 욥의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바로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경중과 크기와 정도는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그 고난에 대해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고난의 크기가 다 달라도 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라고 증언했죠. 믿음의 선배들은 현재 고난과 함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생각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영광을 바라보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즘 우리는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의 폭증, 소비자 물가 상승, 기후 변화로 인한 폭염이나 홍수 피해, 이념이나 차별의 문제등으로 어수선하고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겪어야 될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때 일 수록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는 고난이 와도 이겨낼 힘이 있지만,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때는 같은 고난이 와도 깊은 상처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더욱 가까이 하는 삶이 되길 주님 안에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편 25:14).”

베델믿음지기 서성봉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