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최근에 제 차는 몸살을 앓았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갑자기 날아온 물체가 전면 유리창에 부딪혀 유리를 갈아야 했죠. 브레이크 패드가 거의 닳아 교체했고, 차 시동을 거는데 ‘드르륵’ 긁는 소리가 나서 시동모터를(starter motor) 교체했습니다. 아무래도 10년된 차라 이래저래 하나씩 고칠 것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실은 차 뿐만이 아니죠. 사람의 몸도 나이가 들면 몸의 기관에서 신호를 보냅니다. 아픈 곳도 있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또 먹는 약도 하나씩 보태 지기도 하죠. 저는 30대 후반쯤에 마흔이 되면 노안(老眼; 나이가 들어 시력이 나빠지는 현상)이 온다는 말에 겉으로는 ‘아! 그래요’ 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마흔이 넘은 어느 날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책을 읽을 때는 안경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 눈 뿐이겠습니까? 몸은 관리를(식단 조절이나 운동과 같은 체력 관리등) 하지 않고 쓰면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배도 나오고 여러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의 시편 기자도 시편90:10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건강해서 영원히 살 것 같아도 우리의 인생은 결국 빨리 날아가기에 잡을 수 없음을 한탄하게 되죠. 결국 같은 본문에서 그는 말하길,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90:4).’ 라고 증언합니다. 이 구절처럼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 앞에 계수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빠르게 날아가는 삶에서 속도는 결코 조절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방향입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 어떤 삶의 열매를 맺는가로 평가받는 방향입니다. 세월이 가기는 하는데 방향없이, 삶의 목적도 없이 시간이 흘러 가는 대로만 산다면 이런 삶은 너무 허무하고 무기력할 뿐입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은 60대 초반에 후임자에게 담임 목회를 위임하고 사모님과 함께 선교사로 헌신하셨습니다. 친구들은 은퇴해서 손주를 보며 여행을 즐기는 사진들을 올릴 때 선교사님은 사역 현장의 사진들과 함께 기도를 부탁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제 주변 또래의 친구들은 다들 할 일이 없다고 하는데, 저는 이 나이에 주님이 부르셔서 현지 언어를 배우고, 선교 사역을 하게 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로서 여러분은 인생의 방향을 알며, 그 길을 향해 걷고 계십니까? 아니면, 매 해 신앙의 나이는 점점 늘어나는데, 그와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깊이는(엡3:19) 어떠신가요? 만일 신앙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 같고, 지금은 열정도, 헌신도 전과 같지 않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방향을 깊이 돌아보고 점검해 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예수가 살기에 죽음도 유익함이라(빌1:21) 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기에 그는 또한 말하길,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린도전서9:26)”라고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열심을 다해 사는 인생들도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것을 압니다. 그들은 방향을 제대로 정하면 세상이 주는 기쁨과 영광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그리스도인들은 소유한 인생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마땅히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방향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방향을 점검하고, 그리스도인이 사는 삶의 방향이 얼마나 존귀하고 기쁨과 영광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고 오늘도 우리의 모든 방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삶이 다 되시길 소망합니다.
베델믿음지기 서성봉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