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의 일부는 말씀 묵상반에 참여하는 한 자매님이 사도행전 21:27-40절의 말씀을 갖고 묵상한 나눔입니다. 오늘 목회 칼럼은 말씀 묵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함께 전합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에 오기전부터 이미 벌어질 고난을 예측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순종을 보여주었다. 아마 이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해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바울을 이 자리에 데려다 놓으신 것 같다. 맞아가면서도 저렇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는 베짱이 대단하다. 그것은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믿음과 맞닿아 있고 지금 사는 삶이 주님의 주권아래 있는 은혜로 빚진 삶이라는 것을 바울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울은 죽음의 순종까지 각오했으니 오늘의 고난마저 복음의 기회가 된 것 같다. 자신의 일분 일초를 주님 앞에 값지게 사용하는 모습을 본다.
(적용) 나는 꼭 순교를 통해 죽는 것이 순종의 최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죽는게 두렵다. 그저 우리가 죽음 앞에 서면 명징하게 볼 수 있는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죽음 앞에 서면 돈도 명예도 자녀의 성공도 다 먼지와 같고 재정난, 건강 염려 등 모든 걱정 근심 미움이 모래알과 같이 작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때 가장 친한 두 친구의 죽음을 겪었고 그 앞에서 무너지는 친구의 부모님들을 보았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인생의 허무함도 보았다. 그것을 보면 내 아이들이 죽지 않고 나와 함께 있어주니 힘이 나고 내가 엄마로서 곁에서 아이들을 만지고 바라 볼 수 있어 감사하다. 그리고 나면 오늘을 값지게 살아내고자 하는 힘도 생긴다.
그러니 오늘도 담대해지자. 값없이 받은 은혜의 삶.
오늘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복음의 하루를 살아내자. 기뻐하고 감사하고 충만하자.
가끔은 유언 같은 걸 써보거나 상상으로 죽음이라는 곳 앞에 나를 가져다 놓으면 지금 주님께서 내게 주신 숨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게 되는데, 오늘 아침 또 한번 그런 마음이 든다. 나의 오늘이 너무 축복이다.
같은 날, 제가 참여했던 목회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한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제가 목회를 하며 너무 힘든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 아내가 제게 한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큰 위로가 되었어요. ‘당신이 살아있어 감사해요.’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말인데, 저는 그 날 아내의 말이 목회를 하면서 가장 위로가 되었던 순간이었어요”
앞의 자매님도, 제가 만난 목사님도 같은 날 제게는 같은 울림의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주 잊는 것 중 하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며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루의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돌아볼 때, 결코 오늘의 삶은 그 어떤 때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모두가 오늘이라는 삶에, 감사해야 될 이유들을 헤아려 보면 좋을 것 같아 마음을 전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인사를 하고 일터를 가서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끼니 마다 식사를 하고(때로는 바빠 건너 뛰어도), 모든 일상의 매 순간마다(크로노스), 오늘 나(우리)를 만들어가는 카이로스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참고로 ‘시간’을 뜻한 헬라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를 간단히 말하면, 크로노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주관적으로 의미화한 시간을 뜻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이렇게 인사하고 격려하며 한 마디의 말을 건네 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제게 힘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OO 야, 주님은 나를 존재만으로도 기뻐하신단다.”
그렇습니다.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고 기쁜 삶을 누리시게 되길 주님 안에 소망합니다.
베델믿음지기 서성봉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