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목회 칼럼은 지난 11일, 화요일 새벽 예배 때 말씀을 전했던 본문에서(눅3:1-6) 2절의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의 구절에서 강조했던 ‘빈 들’에 대한 묵상입니다.
성경의 저자인 누가는 침례 요한이 소명을 받는 이 상황에서 한 장소를 강조했는데요. 그것이 ‘빈 들’입니다. 왜 그럼 그는 요한이 소명을 받은 장소로 ‘빈 들’을 기록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인가요. 특별히 성경 곳곳에는 이런 장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이 그에게 언약하실 때 그를 이끌고 밖에 나가(창15:5) 하나님의 언약을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확인시켜 주십니다. 야곱의 경우는 형 에서를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갈 때 하나님을 만나 서원했던 장소를 벧엘로 불렀습니다(창28:19). 모세의 경우는 호렙산에서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아래서(출3:2)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엘리야는 갈멜산의 전투 후에 이세벨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가다 로뎀나무 아래서(왕상19:5),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했던 제자들이지만 그들의 이전의 생업인 고기를 잡으러 간 갈릴리 호수가 해변(요21:1)에서 베드로는 바로 그 곳에서, 예수의 승천 이후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행1:4)에서, 바울은 예수 믿는 제자들을 잡으러 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행9:3) 등등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던 장소를 통해서 매우 중요하게 장소를 부각시키고는 합니다.
누가가 이렇게 강조한 장소가 ‘빈 들’ 입니다. 특히 누가는 본문의 4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사야 40장 3절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 ‘빈 들’임을 강조하는데요. 4절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기 광야를 언급했는데, 광야가 곧 ‘빈 들’입니다. 요한은 이 구절의 말씀대로 빈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준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광야에서 받습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입니다. 그런데 이 광야라는 단어는 흥미로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르인데요. 이 단어의 구성을 보면 ‘~로부터’라는 뜻의 ‘미’와 ‘ 말하다’라는 뜻의 ‘다바르’란 동사가 합쳐져 있습니다. 해석하면 “그 곳에서 말씀하시다’란 뜻이죠. 다시 말해..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광야’ 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광야를 구성하는 단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 있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우리의 삶도 이런 광야같은 삶인가 돌아보게 됩니다. 광야같은 삶이란.. 어떤 형편에도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인가를 돌아 보자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받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때.. 오직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말이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바라고 찾고 구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물론 실제 있는 그대로의 광야는 척박하고 견디기 힘든 삶일 수 있습니다. 뜨겁게 작렬하는 태양으로 인해 낮에 걷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원망과 한탄이 가득한 광야, 그러나 우리는 이런 광야에서, 광야가 주는, 광야만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광야의 삶을 살자고 해서 여러분이 직장에 사표를 내고, 일을 그만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있는 그 곳에서 광야같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붙드는 장소가 되야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직장과 일터, 만나는 모든 삶이 광야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교우분들이 되시길 주님 안에 소망합니다.
베델믿음지기 서성봉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