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늘 질문과 답을 하며 살아가는 삶의 연속입니다. 신앙도 이런 질문과 답을 통해 참된 믿음을 점검하고, 믿음의 삶을 적용하며 사는데요. 이렇게 교회사에서도 약 370년전, 성경에서 알아야 될 중요한 주제를 갖고 질문과 답으로 구성한 교리서가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문답서인데요. 그 첫째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답하죠.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처럼 교리서의 질문과 답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말씀) 그 길과 방향을 인도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이같이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생들이 인생의 목적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던지시는 가장 위대한 두 개의 질문이 있습니다. 지난 토요 예배 때 그 하나의 질문을 갖고 말씀을 나눴는데요. 목회 칼럼의 제한된 지면을 고려해서 두 개의 질문을 2주간에 걸쳐 교우들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가장 위대한 질문 하나(존재적 질문)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니?(Adam, Where are you?)”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여러분 아담과 하와는 뱀의(사탄)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고 두려워 숨게 되죠. 그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냐고 하신 질문인데요. 하나님이 정말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물으신 것인가요? 아니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이 설계하신 에덴 동산에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그가 숨어 있는 것을 아시면서, 어디에 있냐고 물으신 것인가요? 이것은 우리를 향한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존재론적 질문이라 한 것은 이 질문에는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이런 것이죠. “아담 너는 나와 어떤 관계이니? 아담, 네가 죄를 짓고 숨은 것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담 너는 왜 숨었니?”
하나님은 질문을 하신 후, 아담의 답을 기다리십니다.
아담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핑계와 변명을 대죠.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구절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라고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패역한 태도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신 여자가 먹으라 해서 먹었어요. 하나님 탓이에요, 저 여자 때문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어디에 있니?”
이 질문은 우리가 있는 일터와 직장, 가정, 그리고 사람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있는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고, 내 모든 문제를 아담처럼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아니면 아담이 여자 탓을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돌리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는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를 보면.. 답답한 현실이 많습니다. 인플레이션, 치솟는 개스값, 전쟁, 혼란한 정치등, 늘 내 탓은 없고 남 탓만 가득한 삶은 아닌가 싶습니다. 타인의 티는 지적하고 정죄하면서, 정작 자신의 들보는 돌아보지 않는 죄악들이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나 성도들 가운데도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세대 가운데 우리는 진실로 “너는 어디에 있니” 라는 질문을 마음에 기억하며, 우리가 있는 삶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늘 점검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베델믿음지기 서성봉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