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어떤 저항도 없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후,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심한 두려움과 함께 몸을 숨기고 있어야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모함이었지만, 하나님을 모독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되려 했다는 죄로 인해 죽음을 당한 예수였기에,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도 돌아올 사람들의 분노와 박해를 피해 숨어있어야 했죠.

이렇게 숨죽이며 안식일을 보낸 후 첫 날이었습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 보니 막달라 마리아가 쉼 없이 달렸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와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달려갔죠. 그리고 달려 와 보니 돌이 옆으로 굴러져 무덤이 열려 있고, 그 안에는 예수의 몸을 쌓던 세마포와 수건이 놓여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요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위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20:1~10에 기록된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있던 사건입니다.

실은 지난 화요일 묵상반에서 위의 본문으로 묵상 나눔을 하는 중에, ‘두려움’ 에 대한 문제를 얘기하는 중에, 본문과 관련된 질문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봤습니다.

“왜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고도, 그 빈 무덤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을 믿지 못했을까?

왜 마리아는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도 그 곳에 남아 여전히 울고 있어야 했을까?”

 

저는 이 질문을 묵상하면서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나 마리아나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눅9:22)’는, 주님의 말씀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분명 주님이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 안에는 극심한 상실감과 고통,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고, 부활의 현장인 빈 무덤을 보고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죠.

 

저는 이런 모습이 우리의 삶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문제들이 주는 두려움에 잡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많죠.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이 돈이 되고, 두려움의 대상이 자녀가 되고, 두려움의 대상이 일터가 되는 등등’, 이런 두려움과 염려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인 우리에게 무엇을 두려워하라 하십니까?

여호와(하나님)를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경외’란 말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두려움’ 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심판을 말합니다(눅12:5).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하며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분이심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히12:28).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의 대상을 바꿔야 합니다. 나를 두렵게 하는 세상의 문제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하나님께로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확정하고 확정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평안과 소망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진정 이 은혜를 누리는 베델믿음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베델믿음지기 서성봉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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