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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칼럼은 11년 전, 개척했던 그 해 12월 둘째주에 저희 교회 주보에 실었던 글입니다. 우연히 읽게 된 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빼고, 더해주신 사랑을 생각해 보게 되어 함께 나눕니다.
날씨가 제법 추워졌습니다. 새벽 교회 문고리의 차가운 느낌은 ‘나도 겨울이다’라고 시위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옷을 여러 겹 덧 입어도 매섭게 느껴지는 바람은 ‘그래 아틀란타의 겨울은 원래 이랬었지!’ 하고 체념하게 만드네요. 서부에서 6년간 살았던 시간이 꽤 오랜 시간이었나 봅니다. 며칠 전에는 눈이 올 확률이 30% 라는 일기 예보를 알고 아이들이 잠을 자기 전, 소망(?)을 가져보더군요. 무슨 소망이냐구요? 눈이 오면 학교에 안 가도 된다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지 없이 그 소망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다음 날 화창한 날씨에 그만…’
‘소망’, 우리는 뭔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음날 눈이 와서 학교에 안 가는 것이든, 직장에서 승진을 하고, 월급이 오르는 것이나, 아이들이 잔병 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 등등, 우리가 일상에서 기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소망들은 때론 삶의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는 즐거운 것들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소망들이 ‘더하기’로 더해질 때 우린 ‘행복’을 느끼곤 합니다.
예수님도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자신의 생명을 ‘빼기’ 해야지만 이뤄지는 소망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다음은 우연히 책에서 본 글입니다.
“시골에 사는 한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더하기와 빼기를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엄마를 따라 교회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 순간 예배당 정면을 바라 본 소년의 눈은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 듯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무릎을 흔들며 말합니다. “엄마, 저 앞에 큰 더하기 표가 있어요” 그러자 엄마는 그 소년의 손목을 꼭 잡고는 “그렇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에게 더하기 표가 되신단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모든 것으로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지”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십자가를 보고 더하기 표라고 생각했고, 엄마는 지혜롭게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 준 내용입니다.
여러분, 소년이 ‘더하기 ’처럼 본 그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 죽으신 ‘빼기’의 현장입니다. 사람들이 ‘더하기’ 인생으로 살도록 자신의 생명을 ‘빼기’로 주신 현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예수님이 보여주신 ‘빼기’의 인생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빼기’의 삶은 곧 ‘섬김’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빼기’ 의 삶을 기억하며, 우리는 삶에서 가족을,이웃을, 세상을 섬길 때, 그리고 비록 섬기고 싶지 않은 대상에게 조차도 섬김의 삶을 살 때,우린 ‘더하기’의 인생을 날마다 경험하게 된다는 역설의 진리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베델믿음지기 서성봉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