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하셨을까? (마가복음 14:32-42)
한마디로 처절하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 하셔야 될 이유가 있었을까? 이미 하나님의 본체를 버리시고 스스로 인간이 되신 것만 해도(빌2:6-7)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막상 다가 온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그 어떤 때보다 가장 인간적으로 두렵고 절망적인 상황을 겪으셨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고(33), 죽을 것 같다 하셨다(34). 심지어 정해진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실 정도였으니, 정말 처절한 사투였다. 극심한 사투로 인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셨다(눅22:44).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
다시 시작하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 하셔야 될 이유가 있었을까?” 본문을 묵상하며 이 질문을 바꿔 봤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셨을까?” 답은 “NO, 그렇지 않다” 이런 기도가 없어도 예수님은 분명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처절한 기도를 하셨을까?
첫째, 예수님은 철저히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신적 귄위를 보여준 능력(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고, 죽은 자를 살리며, 자연에게 명령하는 능력 등)으로 만 봐도, 예수님은 이런 기도 없이도 모든 인간들을 구원할 방법을 행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말씀으로 끝까지 죽음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 기도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통해 철저히 인간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통해(빌2:8) 어떤 인간도 구원받지 못할 인간이 없게 하셨다. 만일 예수님이 이런 고통을 쉽게 이길 수 있는 분으로 성경이 기록했다면, 사람들은 모두 “그래 예수님이니깐, 예수님이니깐 고통을 이기지 우리는 할 수 없어” 라고 말하며 예수님이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생명의 구원을 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의 시간을 같이 당하셨다.
둘째, 철저히 인간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같은 죄인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한일서 4:9-10)
우리를 살리려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이다.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어떻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화목 제물로 내어주셔서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사랑 자체다. 바로 나 한 사람 때문에 죽으셨다.
셋째, 주님은 “그러나” 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다.
겟세마네의 기도의 절정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 라는 절대적인 순종의 기도다. 순종의 기도는 “그러나” 가 중요하다. 내가 원했던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반전이 “그러나’에 담겨 있다. 내 뜻과 생각과 욕망이 앞설 때 기도는 “그러나”의 담을 넘지 못한다. 기억하라. “그러나”의 담을 넘어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면 십자가 넘어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향하는 반전의 기도, “그러나” 의 기도를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져야 될 담대함을 얻으셨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셨다.
우리 모두는 지금 혼란스럽고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 19의 두려움과 공포는 여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렵고 힘든 시기, 이런 때에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세우신다.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기도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
* 본 칼럼은 2년전, ‘고난주간’에 묵상했던 내용입니다.
베델믿음지기 서성봉목사 드림.